책을 펴내며나는 박열을 알고 있다. 박열을 사랑하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과실과 모든 결점을 넘어 나는 그를 사랑한다. 나는 지금 그가 나에게 저지른 모든 과오를 무조건 받아들인다. 먼저 박열의 동료들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이 사건이 우습게 보인다면 뭐든 우리 두 사람을 비웃어달라고. 이것은 두 사람의 일이다. 다음으로 재판관들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부디 우리 둘을 함께 단두대에 세워달라고. 박열과 함께 죽는다면 나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박열에게 말해두고자 한다. 설령 재판관의 선고가 우리 두 사람을 나눠놓는다 해도 나는 결코 당신을 혼자 죽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재심준비회 편, 《박열ㆍ가네코 후미코 재판기록》, 748쪽, 이하 《재판기록》 이것은 남편인 박열과 함께 형법 제73조(대역죄) 및 폭발물단속벌칙위반 혐위로 기소된 가네코 후미코가 예심원 공판 둘째 날인 1926년 2월 27일에 법정에서 낭독한 <26일 밤>이라는 제목의 수기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후미코에 대한 예심과정에서 예심판사 다테마쓰 가이세이(立松懷淸)는 천황제를 철저하게 비판하는 후미코를 전향시키려고 일곱차례나 설득을 시도했다. 첫 번째는 1924년 1월 25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예심 때였다. 후미코는 이날, 박열이 김중한에게 폭탄입수를 위해 상하이로 갈 것을 의뢰했다는 진술을 했는데, 다테마쓰는 "피고가 품고 있는 그런 생각을 파기할 수는 없는가"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후미코는 "현재로서는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바꿀 뜻이 없다"(《재판기록》, 28쪽)고 대답했다. 두 번째는 5월 14일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있었던 예심 때였다. 이 자리에서 후미코는 철저하게 천황제를 비판했는데, 다테마쓰는 이날의 예심 막바지에 "피고는 개심하는 게 어떤가"라고 물었다. 후미코는 "나는 개전(改悛)의 정을 표하는 일 따위는 결코 하지 않는다"(《재판기록》, 62쪽)라며 전향을 거부했다. 세 번째는 1925년 5월 4일,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열린 예심 석상에서였다. 다테마쓰는 후미코의 소행은 사형을 규정한 형법 제73조에 해당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하고 나서, "피고는 뭔가 반성할 생각이 없는가"라고 물었다. 후미코는 "나의 입장은 이미 선언한 바와 같다.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반성이니 개전이니 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변함없이 전향을 거부했다.(《재판기록》, 100쪽) 네 번째는 그 다음날인 5월 5일 같은 장소에서 있었던 예심에서였다. 다테마쓰는 "피고인은 박열처럼 민족적 사상에서 출발한 것도 아닌데, 뭐든 반성할 생긱은 없는가"라고 민족이 다르다는 것을 이유로 후미코를 박열과 떼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후미코는 "전부터 판사님에게서 주의를 받은 것도 있고 해서 생각을 해보기는 했지만, 도저히 반성의 여지가 없다"라며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러자 다테마쓰는 "피고는 박열에 대한 의리나 피고의 입장에서 생각한 명예 또는 의지 때문에 그런 말은 하는 것은 아닌가"라며 후미코 사상의 주체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질문을 했는데, 당연하게도 후미코는 "그런 건 없다"고 말하고 "장래의 일을 지금부터 미리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며 일축했다.(《재판기록》, 101쪽) 다섯 번째는 같은 달 9일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열린 예심 때였다. 다테마쓰는 "피고는 현재의 생활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자연 과학 같은 것을 연구해 볼 생각은 없는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후미코는 "만약 내가 생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면 당신이 예기한 것처럼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게 나의 성격에 가장 가까운 삶의 방식일 것이다"라고 대답했다.(《재판기록》, 102쪽) 여섯 번째는 6월 6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예심에서였다. 다테마쓰는 "유서 깊은 일본땅에서 태어난 피고에게는 특별히 (천황제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반성할 기회를 주고 싶은데 어떤가"라고 말하자 후키고는 "유서 깊은 일본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 그리고 방법으로 삼고 있는 것이 더욱 필요하고 옳다는 것을 믿는다"라며 역습했다.(《재판기록》, 112쪽) 일곱 번째는 9월 22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예심에서였다. 1925년 7월 17일 박열과 후미코가 형법 제73조 및 폭발물단속벌칙위반혐의로 기소되자, 예심 겸 도쿄항소원판사가 된 다테마쓰는 "피고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반성할 수 없다는 것인가"라며 최후의 생각을 전했다. 이에 대해 후미코는 "반성할 여지는 없다"라고 간결하게 대답했다.(《재판기록》, 272쪽) 다테마쓰는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를 들어 후미코와 박열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면서, 형법73조의 적용 운운 하며 협박도 하고 후미코의 관심을 비정치적인 영역으로 돌려놓으려는 의도의 발언을 하면서, 그녀를 설득, 유도하려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관헌 측에서는 자신이 범한 간토대진재 당시 조선인대량학살 구실을 찾기 위해 무엇보다 박열을 대역죄인으로 삼아 법정에 세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미코가 '불령일본인'이 되어 박열과 행동을 함께 하는 것은 '국체'를 손상하는 일이 되며 따라서 결코 좋을 게 없는 것이었다. 1923년 12월 27일에 일어난 난바 다이스케의 황태자저격사건으로 '국체'가 막 손상당한 참이었다. 앞에서 본 수기 즉 대심원 법정에서 낭독한 후미코의 '선언'은, 전향 공작을 뿌리치고 박열 개인에 대한 사랑을 선언한 것임과 동시에 일본민중을 억압하면서 조선을 식민지화하여 지배하는 천황제에 대한 조선민족과의공동투쟁을 선언한 것이기도 했다. 형법 제73조의 적용을 받을 경우 행위의 기수(旣遂), 미수를 불문하고 형벌은 사형밖에 없다. 후미코도 죽음을 눈앞에 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전향을 관철한 후미코의 강인한 주체성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이었을까. 그것은 후미코 자신이 말한 바와 같이 그 사상형성 과정 속에서 생겨난 것이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이런 사상은 책이나 다른 길을 통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에 비추어볼 때 내 자신이 체험해 온 여러 가지 슬프고 괴로웠던 일들이 나를 다그쳐 단숨에 오늘 이러한 사상으로 밀어올렸던 것 같습니다. 결국 내가 지금 갖고있는 이러한 사상은 다른 사람이 내게 심어준 것이 아니라 내자신의 체험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재판기록》, 256, 257쪽) 사회의 밑바닥에서 살았던 여성의 생활 속에서 고투하는 것, 바로 그것이 그녀의 사상형성사였다. 지금부터 그녀가 살아간 생활의 발자취를 더듬어 사상형성의 과정을 명확하게 하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