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새벽안개님께서 추천하신 에른스트 마이어의 '
진화란 무엇인가'를 읽기 시작했는데, 그 서문을 여기에 옮겨본다.
머리말 진화에 대해 묻고 답하다
진화는 생물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생물학 분야의 “왜?”라는 질문 가운데 진화를 고려하지 않고 적절한 대답을 찾을 수 있는 질문은 단 하나도 없다. 그러나 진화 개념의 중요성은 생물학을 훨씬 넘어선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사고는 자신이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진화적 사고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사실 영향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결정된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정도이다. 따라서 이처럼 중요한 주제에 대한 책을 내놓으면서 굳이 사과의 말은 필요치 않으리라.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도서 시장은 이미 진화에 대한 책으로 포화상태이지 않나요?” 출간된 책의 양만 따져 본다면 “맞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진화 연구가 전공인 생물학자들에게 훌륭한 기술적 교본이 될 수 있는 책들이 있다. 또한 창조론자들의 공격에 맞서 진화론을 효과적으로 옹호하는 훌륭한 책들도 있다. 그리고 지화의 특별한 측면들 예를 들어 행동 진화, 진화 생태학, 공진화, 성 선택, 적응 등을 집중적으로 다룬 뛰어난 저서들도 있다. 그러나 이 책들 중 어떤 것도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생태적 지위를 효과적으로 점유하지 못하는 듯하다.
이 책은 세 종류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썼다. 첫째 가장 중요한 대상은 생물학자이든 일반인이든 진화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이다. 이 독자들은 진화라는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진화가 어떻게 작용하고 다윈주의적 해석에 대한 이루 공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는 잘 모르고 있다. 그 다음 두 번째 독자층은 진화를 인정하지만 진화에 대한 다윈주의적 설명이 옳은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러한 종류의 독자들이 주로 묻는 질문에 이 책이 모든 답을 제공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이 책을 현재 진화론 과학의 패러다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하는, 그 이유가 단지 좀 더 효과적으로 진화론을 공격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창조론자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나는 이 부류의 독자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화 생물학을 유도해 낸 증거들이 얼마나 강력한지, 그리고 왜 창세기에 제시된 이야기들과 어긋날 수밖에 없는지 보여주고 싶다.
기존에 그와 같은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쓰였던 책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단점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책들이 의도한 만큼 교훈적이지 못하다. 왜냐하면 진화와 같은 어려운 주제는 일련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책들 대부분이 진화의 특화된 측면들, 이를테면 변이의 유전적 기초나 성비(sex ratios)의 역할과 같은 주제에 지나치게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책들이 너무나 기술적이며 너무 많은 전문 용어들로 뒤덮여 있다. 오늘날 진화 관련 주요 문헌의 약 4분의 1은 유전학에 집중되어 있다. 나는 유전학의 원리를 철저하게 설명해야한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멘델식 계산이 그렇게 많이 등장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또한 유전자가 자연선택의 대상이라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주장에 대한 반박, 또는 극단적인 발생 반복주의(recapitulationism, 개체 발생이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개념)를 반박하는데 그토록 많은 지면을 할애할 필요도 없다. 한편 이러한 문헌 중 일부는 각기 다른 종류의 자연선택, 특히 번식의 성공에 대한 선택을 분석하는 데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진화를 주제로 삼은 기존에 나온 책은 대부분 두 가지 다른 약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러한 책들은 거의 모든 진화 현상이 두 가지 주요 진화 과정 중 하나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제대로 지적하지 못하고 있다. 그 두 가지 현상은 바로 적응성의 획득과 유지, 그리고 생물 다양성의 기원과 역할이다. 두 현상은 동시에 일어나지만, 각 현상들이 진화에서 맡고 있는 역할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따로따로 분석해야만 한다.
둘째, 진화에 대한 대부분의 문헌들은 환원주의적 방식으로 쓰여 있어서 모든 진화 현상을 유전자 수준으로 환원시키고 있다. 그런 다음 ‘상향식’ 추론에 의해 더 높은 수준의 진화 과정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는 예외 없이 실패하게 되어 있다. 진화는 개체의 표현형, 개체군, 종을 다루는 것이지 ‘유전자 빈도의 변화’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단위는 바로 선택의 근본적 대상인 개체, 그리고 다양한 진화의 무대가 되는 개체군이다. 나는 바로 이 개체와 개체군을 주요 분석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특정한 진화론적 문제를 풀려는 사람이 그 과정에서 진화 생물학의 긴 역사동안 반복되어 온 전철을 밟아 동일한 실패를 되풀이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진화에 대한 지식은 250년에 걸친 철저한 과학적 연구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주어진 진화론적 문제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앞서 간 사람들이 밟아 온 단계들(그중 상당수는 실패한 단계)을 고려함으로써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종종 어려운 진화적 문제들을 풀어 나가며, 진보해 온 역사에 대해 상당히 자세히 다루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인간의 진화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고, 진화를 잘 이해하는 것이 현대 인류의 관점과 가치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는지 논의했다.
내가 원한 것은 지나치게 세부적으로 빠지지 않고 원리에 중점을 둔 책이다. 나는 오해를 바로잡고자 노력했지만 이를테면 단속평형설이나 중립 진화 이론의 의의와 같은 덧없는 논쟁에 지나치게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았다. 또한 끝없이 나타나는 진화의 증거들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었다. 진화가 계속되어 왔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해서 더 이상 상세한 증거를 제시할 필요가 없다. 어쨌든 설득당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어떤 증거를 들이대도 믿지 않을 테니까. - 에른스트 마이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