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진ㆍ오일환 저, 한국전쟁의 수수께끼, 가람기획, 2000, ISBN 8984350397 p177-p190 인천상륙작전은 과연 기습이었나?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중 가장 성공적인 작전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때까지 수세에 몰리고 있던 전황을 단번에 뒤집어버렸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인천상륙작전은 단순이 전세를 역전시킨 것만이 아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지금까지도 돋보이는 이유는 또 있다. 흔하디흔한 전쟁에서처럼 상대보다 전력이 우위에 있어 전세를 역전시켰다면, 그런 전투는 별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인천상륙작전이 주는 감동은 바로 '적의 허를 찔러 일거에 포위격멸한 기습작전'이라는 데에 있다. 여기에 더욱 극적인 요소가 추가된다. 인천이라는 지역이 상륙작전에는 최악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상륙작전의 대상으로 선정된 최악의 장소일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인천 해안은 거대한 갯벌이 해안에서 약 3마일 정도 서쪽으로 뻗어져 있다. 상륙용주정(LST)은 조수가 30피트 이상일 때 이런 지역을 건널 수 있는데, 인천에서 조수가 30피트 이상인 날은 한달에 단 며칠밖에 안된다. 따라서 공격일자와 시간 선정에 많은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상륙을 하려면 그 갯벌을 뚫고 항구로 이어지는 좁은 수로를 이용해야 하는데 여기에도 애로사항이 한둘이 아니다. 이런 수로를 이용한다는 것만 해도 어렵고 힘든 일인데다가, 이 수로 자체도 지형이 험하고 요새화된 월미도에 의해 감시 통제를 받고 있다. 그렇다고 월미도부터 처리하고 가자면 기습의 효과가 없어진다. 상륙부대가 한꺼번에 상륙할 수도 없다. 그래서 1차로 상륙한 부대는 후속부대가 상륙할 때까지 11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 그 동안 먼저 상륙한 부대가 적에게 반격을 받는다면 고립되어 전멸할 위험도 있다. 거기에 도시 자체가 12피트의 방파제로 보호되고 있고, 인천이 부산과 너무 멀어 상륙부대와 미 제8군의 작전이 제대로 연계되기 어렵다는 등의 문제점까지 안고 있었다. 결과만 보자면 이런 난제들을 극복하고 훌륭하게 작전을 성공시킨 셈이다. 오히려 온갖 고난이 많았기 때문에 '적의 허를 찔러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킨 작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의 기록을 조금만 뒤져봐도 이런 일반적인 인식에 쉽게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은 과연 기습작전이었을까?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1950년 8월 29일자 인민군 884군부대 제 5보대 대대전투명령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타난다.
"적은 공화국 인민군대의 맹렬한 공격으로 안하여 무질서한 퇴각을 하다가 다시금 군사적 모험으로써 인천에 상륙하고 계속 전진하여, 우리나라 수도 서울을 점령할 목적으로 덕적도ㆍ용유도ㆍ영흥도 일대에 함선들을 입항 체류하고 있는바, 적들은 기회만 있으면 인천항의 기습상륙을 기도하고 있으며, 더욱 적은 항공으로 인천시 상공을 위협하고 있다. 본 대대는 (중략) 해안 일대에 상륙하는 적을 해상에서 결정적으로 격퇴분쇄하며, 방어구역 우측은 염전으로부터 좌측은 월미도 제방까지이다." 인민군은 이미 2주전부터 유엔 군의 작전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이 예상하고 있었다면 최소한 '기습작전'은 될 수 없다. 오히려 북한의 입장에서는 공격해온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막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결국 인천상륙작전은 '기습작전'이 아니면서도 성공을 거둔 셈이다. 따라서 '기습'은 성공요인이 아니었다. 적의 허를 찌른 기습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세계 상륙작전 사상 최악의 지역에 상륙을 감행하고도 전세를 단번에 뒤집어버릴 만큼 성공을 거두었을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북한측에서는 유엔군의 작전을 미리 간파하고 있었으면서도 인천에 상륙하는 부대를 막지 못할 만큼 전력이 바닥나 있었던 것이다. 맥아더가 성공을 확신했던 중요한 이유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데에 있다. 뻔히 알면서도 막지 못할 정도로 북한의 전력이 바닥나 있었다면 굳이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최악의 장소를 골라 상륙해 적의 허를 찔렀다'는 수식어를 사용했던 것이 무색해진다.
과장된 효과, 축소된 위험
그러고 보면 인천상륙작전은 그 의미부터가 엄청나게 과장되어왔던 셈이다. 의미가 부풀려진 이유는 기본적으로 결과에 현혹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본질적인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인천상륙작전이 구상되고 실행되는 과정은 물론, 작전의 실질적인 효과까지 따져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결과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부터 확인해야 한다. 지금까지 덮어왔던 사실 중 하나는 인천상륙작전에 상당한 무리가 따랐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이 상비군을 감소편성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 자체를 동원한다는 것부터가 무리였다. 또 전황 자체도 일단은 수세였기 때문에 방어 이외의 목적으로 완전히 다른 전선을 형성한다는 것에도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상륙부대를 편성하는 것부터가 상당한 난제였다. 여러 함대에 편성된 해병과 다른 미군 기지병력을 차출하거나 지원을 받고, 그래도 부족한 자원은 동원된 자원으로 보충해야 했다. 물론 이 작전은 상륙부대를 편성하기 어려웠다는 차원에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병력을 여기저기서 차출해 메우다 보니, 전선을 방어해야 할 병력이 상륙작전에 차출되어 양쪽을 왔다갔다하며 우왕좌왕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제1임시해병여단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여단은 전선에서 철수해 인천상륙을 위해 출항을 준비하던 중 다시 소환되어 대구 맞은편 낙동강 중심부의 가장 위험한 돌파지역에 투입되었다. 방어선에 투입되어야 할 병력이 우왕좌왕하자 자연히 전선이 불안해졌다. 워커 장군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계획해두었던 최후방어선 '데이비드슨 라인(Davidson line)'으로의 철수까지 검토해야 했다. 인천상륙작전은 다른 작전에 상당한 지장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전쟁중에 실행되는 작전이 다 그렇듯이, 인천상륙작전도 다른 작전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상륙작전을 위해 빼낸 병력 때문에 전선이 돌파당하고, 최후방어선까지 밀릴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지나친 모험이다. 낙동강 방어선에 악영향을 줄 만큼 상륙작전에 투입된 부대는 대규모였다. 상륙부대의 규모만해도 총 7만여 명에 달했다. 이정도 병력이면 전력이 소진되어가는 인민군 전체의 전력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는 수준이다. 이런 규모의 병력이 전체적인 안전을 도모하는 작전이 아니라 도박에 가까운 작전에 투입된 것이다. 낙동강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고는 하지만 인민군 전력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인천에 상륙작전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지 못할 정도로 예비병력이 없던 인민군이니, 그 전력이 어느 수준까지 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더이상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인천상륙작전에 동원된 대규모 병력이 낙동강 전선에 추가로 투입되었다면 인민군은 공세는 고사하고 방어선도 제대로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낙동강전선에서도 인민군에 반격을 가해 퇴치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는 뜻이다. 여기까지 정리하고 보면 지금까지 알려졌던 인천상륙작전의 의미는 정말 애매해진다. 적의 허를 찌른 기습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 작전이 없었다고 전세를 역전시키기가 곤란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상륙작전에 병력이 대거 차출되었기 때문에 낙동강 전선에서는 심각한 상황을 맞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인천상륙작전의 진정한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단순히 군사적인 측면에서만 의미를 찾으려 한다면 뚜렷한 해답을 기대하기가 힘들다. 적어도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될 즈음에는 의심할 바 없이 유엔 군의 전력이 인민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런 전력을 확보했는데도 전세를 역전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현대전에서는 방어선이 한번 무너지면 수습하기 어렵다. 인민군에게 낙동강 전선에서의 돌파를 막을 예비 병력도 없기는 마찬가지였을 테니, 정상적으로 돌파해나가는 전략이 굳이 인천에 상륙작전을 고집할 필요 없이 안전하게 전선을 정비해가면서 반격을 도모할 수도 있었다. 이런 작전이 통상적으로 쓰이는 전략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굳이 도박에 가까운 상륙작전을 벌인 행위는 군사적인 측면에서만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통상적인 작전과 상륙작전이 가지는 차이를 비교해보자. 한국전쟁의 상황을 놓고 본다면 전선을 중심으로 전개하는 작전은 안전을 위주로 하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전력의 우위가 확보되면 그만큼 예비대에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 되므로 전선이 한꺼번에 무너질 위험은 거의 없어진다. 그 대신 반격작전에 있어서 운신의 폭은 조금 제한을 받는다. 반격을 하더라도 아군의 전선을 정비해나가면서 해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적어도 구경꾼들이 보기에 단번에 승부를 결정짓는 맛은 없다. 반면 상륙작전은 전력우위를 확보하고도 위험성이 많다. 상당 규모의 병력이 일정한 기간 동안 전선에 투입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시점에 적의 공세가 성공한다면 제대로 병력을 투입해보지도 못하고 아군의 전선이 무너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아군의 전선이 버텨준다 하더라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상륙을 한다는 자체가 공격측에는 상당히 불리한 조건을 많이 안겨준다. 상륙뷰대는 훤히 노출되는 반면 이를 저지하는 부대는 은폐ㆍ엄페된 곳에서 사격할 수 있다. 상륙해서 교두보를 확보하기 전까지는 상당수의 병력이 전투력을 발휘할 수도 없다. 또 상륙정 같은 수송수단이 피격당하면 그 안에 탄 병력은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는다. 이런 약점이 있는 만큼 압도적인 전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정쩡한 상륙작전을 감행하다가는 전력의 손실만 입고 효과를 거두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륙작전이 가지는 매력은 역시 적의 배후를 기습한다는 데에 있다. 방어가 취약한 후방을 기습해서 단번에 승부를 결정짓는 게 가능한 것이다. 지리한 전쟁을 좋아할 턱이 없는 일반인들에게는 이런 작전이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런만큼 이런 작전으로 단번에 승부를 내주는 장군이 있다면 그는 쉽사리 전쟁영웅이 될 수 있다. 야심있는 장군이라면 이런 작전의 성공을 꿈꿔볼 만하다. 사실 전력의 우위를 확보하고 나서 차근차근 적을 제압해나가는 전략이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안전한 방법이겠지만, 이를 지휘관의 능력이라고 평가해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지휘관 개인의 출세만 생각해볼 땐 이런 작전에 매력을 느낄 리가 없다. 어차피 이길 전쟁이라는 판단이 들면 '못 이기면 바보가 되는 작전'보다는 화끈하고 멋있게 보이는 작전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작전을 위한 작전
그러고 보면 맥아더는 개전 초기부터 인천에 상륙하는 작전에 집착하고 있었다. 전쟁이 터진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던 7월 첫주에, 맥아더는 그의 참모장 아몬드Edward M. Almond 소장에게 '서울의 적 병참선 중심부를 타격하기 위한 상륙작전 계획을 고려하고 상륙지점을 연구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이 지시에 따라 맥아더 장군의 작전참모부장 라이트Edwin K. Wright 준장이 이끄는 합동전략기획 및 작전단(JSPOG)에 의해 전략이 연구되었으며, '블루 하트Blue Hearts'라는 암호명이 붙여졌다. 이 작전의 개략적인 개념은 남부전선에서 미 제 24ㆍ제25사단이 정면에서 반격을 가하고, 이와 병행해서 해병연대 전투단과 육군부대가 돌격부대로 인천에 상륙하여 내륙으로 진출, 서울을 포위함으로써 적을 38도선 이북으로 구축한다는 것이었다. 7월 4일 맥아더의 참석하에 극동군 사령부에서 가진 첫 작전회의에서, 공격부대는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이미 승인받은 해병 1개 연대로 편성된 전투단 외에 육군으로서는 주일 미 제1기병사단을 운용하기로 논의했고, 상륙일자는 7월 22일로 정했다. 이 작전에 따라 미 해병기지에서는 7월 7일 제1사단 예하 5연대를 주축으로 제1임시해병여단을 창설하고 제1기병사단이 훈련에 들어가는 등 지상군의 상륙준비가 진행되었다. 이 계획은 물론 실시되지는 않았다. 이미 전열이 무너진 국군과 전선에 투입된 미군만으로는 적의 남진을 저지하지 못했고, 현 전선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였으므로 미 제1기병사단도 전선에 투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맥아더는 포기하지 않았다. 상륙지역으로 인천을 강조하면서 상륙작전에 대해 계속 연구 검토하도록 지시를 내린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맥아더는 상황 변화에 따라 상륙작전을 결심하게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상륙작전을 의식하면서 전략을 짜나갔음을 알 수 있다. 이쯤 되면 왜 굳이 상륙작전이어야만 했으며, 또 왜 굳이 인천이어야 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상륙작전에 집착하는 맥아더의 의도를 눈치챈 합동참모본부의 생각은 당연히 반대였다. 이렇게까지 모험을 감수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작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의 태도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자칫하면 막대한 병력이 전선에 배치되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부산이 함락될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다. 이런 상황을 방치해 가면서까지 맥아더는 상륙부대의 차출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태가 심각하게 되어감에도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에만 신경을 쓰자, 합동참모본부는 극동군 사령관에게 인천상륙작전이 잘못될 경우 재앙을 맞이할 것이라는 경고를 보내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맥아더는 합동참모본부의 반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계획을 밀어붙였다. 심지어는 8월 30일, 인천상륙작전 명령을 하달하고도 명령서의 사본을 즉각 합동참모본부에 보내지 않았고, 그들의 8월 28일자 메세지에 응답도 하지 않았다. 결국 합동참모본부는 첫 부대가 해변을 공격하기 불과 몇시간 전에야 계획의 구체적인 세부사항을 알게 되었다. 작전명령을 휴대한 전령이 워싱턴에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전령인 스미스Lynn D. Smith중령에게 '너무 빨리 도착하지 말라'는 언질을 했다고 한다. 그말을 충실히 따른 스미스 중령은 9월 13일 23시에 워싱턴에 도착하여, 11시에 합동참모본부에 나타났다. H-hour가 극동시간으로 9월 15일 06:30에, 워싱턴 시간으로 9월 14일 17:30에 맞춰진 것을 감안하면 합동참모본부가 계획을 취소할 만한 시간이 없었다. 결국 맥아더는 전쟁에 이기기 위해 상륙작전을 밀어붙였다기보다, 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위해 모든 장애를 밀어붙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쑈, 원산상륙작전
맥아더가 얼마나 상륙작전에 매료되어 있었는지는 원산상륙작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지금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가려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원산상륙작전 역시 맥아더로서는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다. 당초 원산은 미 제8군 주력이 38선을 돌파한 후, 1주일 내에 미 제10군단이 원산에 상륙하여 점령, 확보하도록 계획되었다. 그만큼 원산은 중요한 지역이었다. 전선이 북상함에 따라 부산항의 보급기능이 약화되고 인천상의 보급기능은 제한되므로 국군 및 유엔 군 전 부대에 원활한 보급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동부 전선에 원산항이 필요했다. 그래서 2개 사단이나 되는 유엔 군 병력을 이 작전에 투입했던 것이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 작전은 코미디로 끝이 났다. 미 제10군단이 원산상륙을 위해 배에 타기도 전인 10월 10일, 국군 제1군단이 원산을 점령해버린 것이다. 원산상륙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던 미 제10군단은 글자 그대로 '행정적 상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행정적 상륙'도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 제10군단은 계획보다 늦은 10월 26일부터 겨우 상륙을 시작했다. 상륙이 늦어진 이유는 기뢰 때문이었다. 수많은 기뢰가 광범위하게 부설되어 있어 상륙 예정일인 10월 20일까지도 모두 제거되지 못했다. 덕분에 미 제10군단은 원산 외항에 도착한 후에도 거의 1주일이나 물 위에서 무료하게 왔다갔다 해야 했다. 그 꼴이 꼭 요요 놀이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요요작전'이라는 비웃음까지 사야 했다. 미 제10군단이라는 막강한 부대를 동원한 작전치고는 정말 웃기는 결말이었다. 그렇지만 그냥 웃고 넘어가기에는 그 악영향이 상당히 심각했다. 이는 단지 2개 사단이라는 병력이 상당한 기간 동안 아무 도움도 되지 않게 움직였다는 정도에서 그친 문제가 아니었다. 원산항을 확보하려 했던 이유는 보급선 확보 때문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부산항의 보급기능은 약화되고 인천항의 보급기능은 제한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굳이 원산항을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원산항을 상륙작전으로 확보한답시고 인천에서 미 제10군단 병력을 승선시키는 바람에 정작 북진하는 미 제8군을 위한 하역이 뒷전으로 밀려나버린 것이다. 덕분에 부산으로부터 보급품이 수송될 수 있도록 경부선 철도와 국도를 급히 복구해야 했다. 결국 국도는 9월 말, 철도는 10월 10일에야 복구를 끝낼 수 있었다. 이것이 미 제8군의 공격개시 시기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쉽게 말해서 본격적으로 북진해야 할 시점에 2개 사단이 제대로 투입되지도 못한데다가, 원산상륙작전을 위한 준비로 인해 미 제8군의 북진개시가 그만큼 늦춰진 셈이다 이는 후에 중국군이 개입하여 성공적인 작전을 할 수 있도록 공헌(?)을 했다. 이런 사태를 감수해가면서까지 맥아더는 상륙작전에 집착했던 것이다. '적의 배후를 찌르는 상륙작전'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렬한 것이었나를 다시금 보여주는 대목이다. 나쁘게 말하면 맥아더는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잇는 전쟁을 지휘하면서, 자신의 입신양명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전쟁을 이끌어나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맥아더라고 위험한 도박을 하다가 실패했을 경우를 생각하지 않았겠느냐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도 그다지 훌륭한 변명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어차피 북한 단독으로는 미국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미국이 개입했다는 것만으로도 북한으로서는 사실상 이길 수 없는 전쟁이 되어버린 셈이다. 만약 잘못된다 하더라도 한국전쟁은 자기 조국인 미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전쟁이 아니었기 때문에 맥아더로서는 실패에 대한 부담이 그만큼 적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것은 결과론일 뿐인지, 당시 실제 상황에서는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한 작전이었다는 것이다. 국가의 운명을 건 전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과연 바람직한 전략이었는지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조국 미국이 위협받는 상황이었다면 이런 작전이 쉽게 용납되었을까? 어떻게 보면 맥아더라는 한 개인의 야심으로 한 나라의 운명이 좌우될 도박이 감행된 셈이다. |
2011.3.5 데이비드 핼버스탬 저/정윤미, 이은진 역,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 p457- 보통 상륙작전을 펼칠 때에는 기습의 요소가 아주 중요한데 이상하게도 이번 작전에서는 그게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도쿄 사령부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서 작전이 개시되는지 다 알고 있었다. 전쟁에 대한 각종 소문의 온상지였던 도쿄 기자 모임에서는 "누구나 아는 작전"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중략)
인천에서는 운이 좋았다. 사실 김일성이 그다지 영리한 상대가 아니었다는 점이 크게 기여했다. 이유가 뭐였든 김일성은 미군이 공동 상륙작전으로 뒤통수를 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공군은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기 몇 주 전부터 일본에 대규모 미군 부대가 모여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었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일본은 첩자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었다. 주요 항구의 보안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고 부두 잡역꾼 상당수는 열성적인 공산주의자였다. 덕분에 중공군은 공동 상륙 작전에 쓰일 장비들이 일본에 속속 도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8월 초, 마오쩌둥은 인민군의 공격 상황에 대해 듣고 걱정스런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김일성은 단기간에 전쟁을 끝내겠다고 했지만 아무런 진척이 없어 보였다. 마오쩌둥은 미군들이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부산방어선에서 더 이상 물러나지 않고 끈질기게 저항하면서 제일 우수한 사단 2개 병력을 일본에 준비해둔 것도 알고 있었다. 공동 상륙 작전모의 연습도 진행 중이라 분명히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오쩌둥은 뛰어난 전투력과 무기를 갖춘 국민당과 싸우며 평생을 보냈기 때문에 전쟁에 성공하려면 군사정보 수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적이 강할 때는 멀리 물러나 있다가 약해질 때 집중 공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다음 전투에 대비해 언제라도 교신을 단절시킬 준비를 했다. 마오쩌둥은 이렇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주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천상륙작전이 실행되기 한참 전인 8월 초에 참모 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저우언라이의 비서관 레이잉푸(雷英夫)를 파견해 미군의 계획과 다음 공격 장소를 알아보게 했다. 그야말로 순수하게 군사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였다. 중공군 정보 요원들은 미군 부대가 공동 상륙 작전 훈련을 받고 있으며 일본의 모든 항구가 미군과 세계 각지에서 온 선박들로 붐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게다가 맥아더는 공동 상륙 작전을 반복하며 태평양 전쟁을 수행했던 전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레이잉푸는 모든 상황을 면밀히 조사하고 분석한 후에 미군이 인민군을 넘어뜨리려고 대규모 덪을 놓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인민군 진지에서 한참 떨어진 지역에 기습적으로 침투하여 부산방어선까지 밀려난 전세를 뒤집고 인민군 전체를 곤경에 빠뜨릴 심산이 분명했다. 레이잉푸는 지도를 보면서 미군 지휘관이 어떤 생각을 할지 추정해보았다. 공동 상륙 작전을 펼칠 만한 항구는 여섯 군데 정도였고 평소 공격성이 아주 강한 맥아더의 성격으로 볼 때 인천을 선택할 확률이 높았다. 인민군이 낙동강을 따라 마지막 공세를 펼치기 일주일 전인 8월 23일(공교롭게도 그날 맥아더 역시 다이이치에서 참모들을 앉혀놓고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였다.) 레이잉푸는 저우언라이에게 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저우언라이는 그가 수집한 정보를 마오쩌둥에게 즉시 알렸다. 마오쩌둥에게 불려간 레이잉푸는 맥아더가 주로 활용하는 전술, 사고방식, 특성에 관해 기록한 세 페이지 분량의 메모를 전달함으로써 미군의 예상 움직임에 대한 브리핑을 마쳤다.1) 마오쩌둥은 그 내용을 김일성에게도 그대로 알려주라고 지시했다. 러시아 측 고문들도 비슷한 경고를 했지만 그 어느 것도 김일성을 설득하지 못했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본래 김일성이 권력을 잡은 건 전쟁에 대한 예리한 안목 덕분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대에 살아남아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전적으로 포용한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권력은 대부분 적군이 물려준 유산이라 마오쩌둥이나 호치민처럼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앉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겪을 필요도 없었다.
1) 천젠 인터뷰 |
p470- 한편 윌튼 워커가 제8군을 이끌고 낙동강 지역을 빠져나오는 데 애를 먹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맥아더 본부의 좌절감은 갈수록 커졌다. 하지만 이들의 좌절감도 현장에 있던 워커의 심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9월 17일 브리핑에서 인천상륙작전을 보고받으면서 인천 지역 방어 상태가 아주 부실하다는 걸 알게된 워커는 몹시 화가 났다. 브리핑이 끝난 후에 그는 친구에게 한탄했다. "세상에, 월미도와 인천에 있는 애송이들을 상대하느라 우리보다 더 많은 탄환을 썼어. 나는 적의 지상 병력 90퍼센트를 감당하면서도 그만한 지원을 못 받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지?"9) 워커의 부대원들은 낙동강 지역을 빠져나오느라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인민군의 진격에 맞설 때 아주 훌륭한 방어물이 되었고 인민군으로부터 미군을 보호해주었던 낙동강이 인민군의 뒤를 쫓을 때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워커를 분노하게 만든 것은 상관들이 가하는 압력과 각종 군 장비의 부족이었다. 특히 가교 설비가 부족했지만 관련 설비에 대한 우선권은 모든 다리가 격파된 한강을 건널 제10군단에 돌아갔다. 워커는 이런 사항이 알몬드 본부에서 결정되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주사위가 자신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던져질 거라는 생각에 위협감을 느꼈다.
9) John Toland, In Mortal Combat, p205 |
# by 추유호 | 2005/08/06 13:57 | 역사, 사건 | 트랙백(1)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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